Part I. 한달

2013년 8월 28일 (수) 23:30

형호는 어떤 사람이었니

형호의 형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이에요.

질문에 그녀는 웃음지으며 이야기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사람… 저를 너무 사랑해준 사람이요.

동생이 떠난 다음날 23시경 찾아온 동생의 동아리 후배는 동생이 얼마나 좋은 선배였는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보는 동생과 다른 사람이 보는 동생은 조금 달랐다. 선배로서, 친구로서의 동생. 유머가 있고 젠틀한 선배였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어서 다른사람들이 보는 동생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자리에 있던 동생 친구들에게 묻고, 그녀(동생의 아내)가 생각하는 동생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단순하고 추상적인 답은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웠지만 결국 그 두개의 문장과 웃음이 전부였다.

경과

동생은 암으로 2년 반동안 고생을 했었다. 2011년 1월 설암수술후 4월까지 본가에서 요양하고, 7월 검진때 폐암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로부터 2년동안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2년반 기간동안 본가에서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지낸 기간이 대부분이었고, 그래도 집을 오래 비우면 안된다고 서울 본인집에 돌아가서 지낸 기간이 9개월 가량이었다. 하지만 폐암이라는 병은 조금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몸이 꺾이면서 계단 내려가듯 안좋아지는 병이었고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다.

경기도에 있는 부모님 집에 있을때는 살이 붙다가도, 서울 본인 집으로만 가면 몸이 안좋아져서 다시 본가로 들어오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부모님은 걱정이 되셔서 동생이 서울집에 있더라도 경기도에서 음식을 해서 집으로 나르는 생활을 계속하셨다. 동생이 음식을 챙기는데 요령이 부족한 어려움이 있었고, 직장을 다니는 (동생의) 아내가 챙겨주기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회사일은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 같은데도, 집안일은 그 손쓰임이 다른지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동생이 청소하고 음식을 챙기는 생활이었다. 한달에 한번정도 있는 병원진료도 동생의 아내는 회사원이라 가지 못해서 항상 형수(내 아내)와 함께 병원을 갔었다.

폐암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지인들은 “왜 서울에 있어? 공기 좋은데로 짐싸서 가야지”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의 직업이 서울에 있어 본인만 갈수도 없다 했었다. 성당에서 지원하는 요양센타에서 한달씩 시간을 보내기는 했고,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올때도 있었지만 서울에서 폐암환자의 치료란 결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암의 치료란 영양분과 공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동생은 항상 비용이 적게드는 방법으로 치료방법을 잡았다. 그래서 신약도 적용하게 되었고, 유명 요양병원도 지방에서 숙식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다. 당장 항암 치료할때나 각종 검진비용에 대한 비용도 보험이 있기는 했지만 비용이 전부 인정되지 않아 가계가 어렵다 했었다. (동생의) 아내는 은행원이었기 때문에 세부사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동생은 암치료 방법을 찾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모든 보험금 청구 및 세부사항에 대한 관리는 그녀가 담당했었다.

2012년 가을경 동생은 아내도 아내의 길을 찾고, 본인도 본인의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서 이혼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후 에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어 형수(내 아내)가 물었다. “저번에 이야기한 것 어떻게 된거야?” “이야기 했었는데요. 아내가 저 살려보고 싶데요. 그래서 안헤어지기로 했어요.” 라고 동생이 답했다.

그건 네 희생인데?

형수가  말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나는 그들이 그렇게 정했다면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문제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아쉬운 마음이 컸다. 사람의 말이 그러하다면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데 남아있는 건 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보고 배운바가 있어야 하는데 보고 배우지 못했다면 말과 마음이 그러하더라도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음식과 환경)을 해주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범위에서 필요한것만 한다는 것.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어떤 사람인지 알게된다는 점.

미안한 마음

동생은 본인이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형(나)이나 부모님, 가족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해서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암과 돈. 두마리 토끼를 항상 같이 생각해야 했었던 것도 30대 중반 암에 걸린 가장에게는 큰 짐이었으리라. (동생의 장인어른은 그녀가 고등학교때 돌아가셨고, 그때 장모님이 간병하느라 우울증이 있어 알리지 않는게 낫겠다 했었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본인과 그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해서 더 강요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의 처가집은 설암수술은 알았지만 2년동안 동생의 폐암발병여부에 대해 모르다가 동생의 여명이 얼마남지 않음을 알린 2013.7.29 경 그 내용을 동생의 아내를 통해 알았다)

2013년 7월 27일(토)

동생이 새벽에 급하게 찾았다. 병원으로 달려간 형에게 말했다.

형 나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진작 이렇게 마음먹고 준비했어야 했는데… 내가 항상 이렇게 늦다.

퉁퉁 부어있는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부은 얼굴도 저렇게 환하게 보일수 있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4인 병실이 불편해서 1인실로 옮겼다. 짐을 옮기고 몇가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갑자기 동생이 침대위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뭐야. 뭐야. 왜 이래. 왜 괜찮아져. 이러면 어쩌라고.

그리고는 침대 안전바를 흔들면서 오열했다.

아 어쩌라고 괜찮아져. 나 돈도 없는데. 1인실에서 이러면 어떻게 해.

그 놈의 돈이 뭔지. 저놈 자기 목숨이 경각에 있는데도 저렇게 돈때문에 걱정하는구나. 같이 울었다. 그날 우리가 내린 결론은 몸 상태가 다시 괜찮아진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항암치료는 더 받지 않기. 그리고 다시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였다.

그래 그러는게 맞겠어. 그냥 난 오늘을 즐길래.

눈을 감고 침대에 앉아 음악을 듣는것 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동생이 말했다.

폐암이 커져있다는 것은 말을 편히 할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원래 발병했던 설암(두경부암)도 절제해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곳도 암이 퍼져있어서 이야기나 이해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했다.

형. 사람들이 내가 괜찮아 보여서 그냥 알아듣는다 생각하고 말 하곤 하는데 사실 오른쪽 잘 안들려. 그리고 이해하려고 집중해야지 이해돼. 그렇게 듣는거야.

그런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동생에게 내가 가진 컨텐츠나 방법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네가 가르쳐준 이야기들이 큰 자양분이 됐어. 걱정하지마. 다 잘될거야.

그리고 매일매일 퇴근후 병원에 들러 동생과 함께한 시간들 그 시간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결국 정확히 한달후 동생은 떠났다.

8월 9일(금) – 퇴원가능

합병증이 치료되어 퇴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금 퇴원하지 못하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할수도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동생의 몸상태는 걸음과 대소변을 혼자 해결할수 없는 상태여서 집에 준비가 필요하다 했다. 동생의 아내는 휴직상태로 어머니와 주야간을 번갈아가면서 간병을 하고 있었다.

8월 12일(월) 사돈총각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동생의 아내가 전날 이야기했다. 월요일 저녁에 만났다. 정중한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정말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저희가 병원에 가도 도움될게 없어서 안가고 있습니다.

결국 요점은 퇴원후 여동생 혼자 있을때 형호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와 현재 휴직상태인데 경제적인 부분을 도와줬으면 하는 말이었다.

‘사람이란게 그렇구나… 결국 동생을 위하는 이야기구나.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어련히 알아서 할까… 저 말 하려고 오늘 보자고 한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이 시켜서 하는것처럼 느껴져서 매일 병원을 가다가 월요일 저녁이후 화,수는 가지 않았다. 퇴원만 하면 되고, 야간은 동생의 아내, 주간은 어머니가 교대로 간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5일(목) 아직 퇴원전이다. 병원비 및 1인실 비용은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병원에 찾아가 이야기했다. 동생의 아내도 오라했지만 전날 동생 병간호 하느라 잠을 못자서 지금 못오고 저녁 늦게 올수 있다 했다. 동생에게 이야기했다. 지금 퇴원하지 않으면 집에도 못 가보고 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형도 생각해 달라는 것.

내가 집에 도움이 될 나이인데 지금 이렇게 짐이 되어버렸어. 돈벌때 엄니한테 형한테 뭘 해줄수 있겠다 생각해서 기분 정말 좋았는데 얼마 벌지도 못하고 이렇게 되어버렸어.

오열하는 동생을 보며 참 슬펐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그리고 이야기 했다. 미안해 하지 말라고, 너는 나에게 좋은 동생이라고, 미안해 말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는 날이었다. 오늘을 잊지 않겠다고. 약에 대한 준비시간도 필요하니 내일 퇴원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해놓고 몸 상태에 따라 금요일 아니면 토요일에 퇴원하기로 했다.  동생은 다음날인 금요일 퇴원했다.

8월 16일(금) 집으로

퇴원후 저녁때 어머니가 서울집에 같이 주무시고 낮에 집에 다녀오시는 간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동생의 아내는 첫날 음식 장을 보고 더이상 장을 보지 않았다. 음식준비는 간병을 위해 마포에서 잠을 자고, 낮에 일산 집에 다녀오시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고 (나중에) 알았다. 왜 장을 안보냐는 어머니의 말에 일주일에 한번 장본다는 며느리의 대답이 있었다고 한다. 퇴원후 떠나기 전까지 10일이 있었기 때문에 말만 하는 사람과 행동을 같이 보이는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동생의 처가집에서도 정말 마음만 굴뚝같았는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었다.

...

8월 25일(일)

동생집에 방문을 했다. 동생의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죽기는 싫은가봐요. 이대로는 못산다고 같이 떨어져 죽자고 했는데 대답안하더라구요.

동생은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말하기도 어려운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힘드니까 그냥 하는 이야기지 라며 웃으며 돌리는 이야기로.

정말이에요. 9층이면 죽지않고 다치기만 할까. 아래 나무 없나 보고 그랬어요.

확인하듯 이야기한다. 많이 힘들어서 그런가 싶었다. 그래도 좀 심했다. 동생 마음은 어떨까.

8월 27일(화)

무더운 여름날 동생은 거실쇼파에 계속 있었다. 거동이 불편했고, 두명이 간호하기에 방은 비좁았다.  거실 쇼파에서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불편한 숨을 이리 저리 고르고 있었다.

엄니 저 아래로 내려줘요.

처음으로 바닥에 앉게 해달라 했다. 동생의 아내는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고, 동생이 바닥에 내려오며 엄니와 마주보고 앉는 순간 퍼뜩 엄마의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말했다.

형호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떠나 간단다. 너는 좀 빨리 가는 것 뿐이야. 그러니 너무 아쉬워 말아라 알았지?

모자(母子)는 그렇게 앉아서 눈을 마주 보았다. 그때의 깨끗한 흰자위, 맑은 눈빛을 어머니는 두고두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마주보다 갑자기 숨을 후욱하고 크게 들이마시더니 뒤로 쓰러졌다.

동생은

그렇게

떠나갔다.

3년전의 기록들

담벼락을 뒤돌아 보았다. 나는 그동안 어떤 글을 써왔었나. 어떤 일이 있었나 되돌아 보고 싶었다.  바쁜 생활에 간간히 친구,지인들과 농담할수 있는 공간이었고, 만나진 못하더라도 같은 생각을 나눌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눈다 보다는 찾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을까. 2011년 1월. 그때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2010-2011경에는 전부를 이야기했더니 어렵다 해서 그 다음 부터는 가능한 부분만 이야기한다.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했나. 다들 가까이는 가는데 풍덩 들어가지는 않는다.  몇몇 조언을 했던 멘티 한명이 다가와서 이야기한다. “다들 왜? 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큰 그림을 한번 설명해주시는건 어떨까요?” 새로운 단어가 많아지면 다들 어려워한다고 답했다. “그래도 이제는 한번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고민중이다.

 2011. 1. 2  씨앗과 발자욱들

SNS. 저는 친구 찾기로만 이해되는 상황이 조금 아쉽더군요. Human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상호 조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의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Know Can Do 와 SNS. 비움과 배려가 저의 2011년 KEYWORD입니다. via 록 담벼락 – 2009 년에 읽었던 책입니다. 2011.1.2  

 2011. 1. 13

1월초에 윗 글을 적을 때만해도 동생이 암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알게 된 후에 찍은 지하철역 사진이다. 병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는길이었다. 전학가기전에 집은 잠원동, 학교는 합정동에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형과 초등학교 1학년 동생은 매번 지하철을 타고 2호선과 3호선을 다녔다.

2호선과 3호선의 교차점. 벌써 25년전의 이야기구나.

2011. 7월

동생이 폐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때 적은 글이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어떤 글은 그때의 나를 마주하게 한다.

 내 마음을 누가 알까. 네 마음을 누가 알꼬

페이스북 메모

누구나 사용하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것과 같아졌다.  정보를 전달하거나 균형된 감각을 기르기에는 부족하지만 약한고리를 연결하고, 사람을 발견하고, 기록을 남기기에는 매우 유용하다. 3년전을 되돌아보면서 그때의 글들을 꺼내서 포스팅해보는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부족으로 단어만 남기거나, 모르겠다는 미완의 글도 많지만 그 글들이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어떤 것을 몰랐는지를 모르는 시점이 오기 때문에 안다고 남기는 것 만큼 모르겠다는 기록도 중요하다.

  • 담벼락에서 의미있는 글 발췌: Using facebook like clip 130223| #eWord.
  • Facebook 에 대한 단상 130303| #eWord.
  • 페이스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 일까 : 명함, 관계,한계,효용,비효용,쉼표 메세지가 전달된 수치가 Like 로 계량화가 가능하지만 역설적으로 like를  활용하는 사람들과 like 하지 않은 사람들에 주의를 기울일때 Next가 있을 것이다.via Facebook 120805 | #eWord.
  • 트위터를 통해 행동경제학과 자연과학에 관심있는 분들과 연결될 수 있었으며, 요청(멘션)에 의해 책을 추천받기도 했다. 그 추천받은 책들은 내가 묻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고, 그 덕에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via 페이스북 2013년 한국 단상.  13.10. 4| #eWord.

Gravity와 존재

그래비티 리뷰

가공할 무(無)가 불러오는 극단적 단절에 마주하여 그녀가 매달리는 건 목소리다. 응답이야말로, 주고 받는 대화야말로 강력한 초월성 앞에서 그녀가 ‘거기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야 비로소, 라이언은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더 정확히 말하여 ‘홀로 죽어가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 맷의 환상이 나타나 보드카를 한모금 쭉 들이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여긴 말야, 혼자 있기 좋을 만큼 조용하고 눈 감으면 세상사도 잊혀지지. 상처 줄 사람도 없고 인생은 별 게 없어. 그래도, 계속 가기로 했다면 끝까지 가 봐야지.

상처의 흔적은, 다시 말해, 곧 관계의 흔적이다. 라이언은 관계의 기억을 쫓는다. 그녀가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계속 가기로 했다면 끝까지 가야만 한다. 이 여정이 진정 끝이 날 때까지 – 출처: Suhkyung Selene Kim Facebook 그래비티 리뷰

어떤 글은 묻혀있던 기억의 흔적을 꺼내온다.

기억의 흔적

2013년 7월 27일 병원으로 빨리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토요일 아침 병원에 도착한 나에게 동생이 이야기했다. “형 나 더이상 안되겠어.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내가 항상 이렇게 늦다.” 4일전 의사에게서 들은 여명이 얼마 안남았다는 이야기를 전했을때만해도 “형 똑바로 알고 이야기해. 나 치료하는 방향잡는데 헷갈리게 하지마”라며 혼내던 동생이었다. 토요일 새벽에 숨이 넘어갈뻔 했다고 한다. 다행히 상황이 조금 호전되고 나서 이 이야기를 했다.

숨이 넘어갈뻔하며 죽을거라는 생각을 하니 아무말도 못하고 이렇게 간다는게 가장 두려웠어.

그리고 나는 동생과 약속했다. 못다한 이야기들을 완성해주기로.

11월 24일 일요일.

동생이 떠난지 3달이 다 되어간다. 글을 적다보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몇가지들도 같이 생각났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차이가 크면 불행한거야.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 그게 행복한 삶이야.

존재는 관계에서 존재하고, 가치란 그 사이에서 생겨난다.